
요즘에 슈퍼로봇대전 V를 열심히 하고 있다.

전투영상 나올 때 홈트하면 딱 좋길래, 열심히 돌리고 있는데, 진작에 V를 했어야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함대연출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야마토를 볼 때마다 괜찮네... 싶었는데, 이 슈로대에는 크로스본 건담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인 건담 더블오와 시드 데스티니가 참전한다.


슈로대 V 말고도 어쌔씬 크리드 오딧세이도 하고 있는데...

이거 바다속에 들어가야돼? 나 어렸을 때 죠스보고 상어 무서워서 바다가기 싫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건담 시리즈를 참 좋아하는 편이지만,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건담을 보지 않고 있다. 에이지는 그닥 정이 안 가고, 철혈의 오펀스는 토미노 옹이 맡았다고 해서 한번 볼까 했지만, 3화 이후론 평가가 수직으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보는 걸 접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최초로 본 건담은 ‘기동전사 건담 0083 – 스타더스트 메모리’였고,

내가 마지막으로 제대로 본 건담은 ‘기동전사 건담 OO’이다.

더블오의 경우에는 사실 굉장히 많은 기대를 했다. 건담 시리즈 최초로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극장판이며, 시드나 시드 데스티니가 벌인 희대의 불살 논리, 페이크 주인공 등으로 이미 건담에 대한 애정도가 미치도록 떨어진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제대로 한 번 보자는 생각에서 더블오에 기대를 걸고 열심히 찾아봤다.

건담 더블오에 대한 평가는 조금 뒤로 미루고,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더블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사지 크로스로드에 대해서다. 정말 제대로 만들었으면 매력적이면서 입체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었음에도, 제작진의 역량 부족이 그를 ‘오라이저 배달부’ 정도로만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일단 사지 크로스로드에 대해 대충 설명하면...
사지 크로스로드(沙慈・クロスロード, Saji Crossroad)
출생: A.D.2290년 3월 10일(물고기자리)
나이: 17세 (1기) → 22세 (2기) → 24세 (극장판)
신장: 168cm (1기) → 178cm (2기)
체중: 50kg (1기) → 60kg (2기)
혈액형: A형
더블오의 스토리 라인을 잘 살펴보면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됐다는 걸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솔레스탈 비잉을 대표되는 더블오의 메인 스토리 파트로, 여기서의 주인공은 세츠나 F. 세이에이.

두 번째 파트는 심도있는 정치극 파트로, 이쪽 파트의 주인공은 순진한 평화주의자가 다였지만, 정치에 대한 경험치가 쌓여가면서도 자신의 이상을 끝까지 잃지 않는 아자디스탄의 왕녀 마리나 이스마일.

마지막 파트는 전쟁의 중심에도, 정치의 중심에도 있지 않은 오로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몸으로 겪는 민간인 파트로. 가장 중요한 이 파트의 주인공이 바로 사지 크로스로드이다.

테러리스트 솔레스탈 비잉의 세츠나나 아자디스탄의 왕녀 마리나와 달리 사지는 특출난 것 하나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공학 쪽을 전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실제로 성인이 된 2기와 극장판에서는 엔지니어가 된다- 양친은 잃었지만, 기자로 일하는 누나 키누에 크로스로드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년이다. 여자친구 루이스가 부호의 딸이지만, 세츠나나 마리나에 비해 그리 특별한 설정도 아니고, 루이스의 징징거림을 달래는 사지의 모습은 한쪽에선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나가지만, 한쪽에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민간인 파트를 보여주기엔 제격인 스토리였다.
솔레스탈 비잉에 의한 테러 근절이 본격화됐지만, 사지에겐 먼 나라 이야기였고, 테러에 대한 걱정보다는 레포트 걱정이 우선이고, 왈가닥 여친에게 적당히 휘둘리는, 솔레스탈 비잉으로 세계가 시끄러웠지만 등장으로 시끄러워도 자신과는 큰 관계없는 그저 뉴스에 나오는 가십거리 정도로 인식하고 사는 평범한 인물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사지라는 소년이 평범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한 것은 퍼스트 시즌 후반이었고, 세컨드 시즌 초반에는 그 사건에 본격적으로 휘말리면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 평범하지 않은 일들을 겪으며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가 된다.


사지의 일상이 평범해지지 않기 시작한 것은 여친 루이스가 친척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트리니티 팀의 네나 트리니티의 화풀이로 가족을 모두 잃고 본인도 왼손을 잃는 사고를 당하면서였다. 루이스를 찾아가지만 루이스는 사지의 꿈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말하고, 결국 루이스와 다음을 기약하며 결국 헤어진다.
거기에다가 이오리아 슈헨베르그와 솔레스탈 비잉에 대해 조사하던 누나 키누에마저 아리 알 서셰스에 의해 피살당하면서 퍼스트 시즌 초반부에 평범한 일상을 누리던 고등학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불행이 연이어 맞게 된다.
누가 누나를 살해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누나가 솔레스탈 비잉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게 되면서 사지는 건담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존재라며 마음속 깊이 증오를 품게 된다. 퍼스트 시즌 후반부에 사지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트리니티 팀과 UN군 간의 전투를 시청하며 “죽어버려라, 건담...”이라고 말할 정도로 어두워진다.
난 이 부분에서 사지라는 평범한 인물이 평범하지 않은 사건에 연관되면서 변혁의 중심에 뛰어드는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제작진은 사지가 그렇게 변해버리면 스토리 짜기가 어려워진다고 판단했는지, 퍼스트 시즌 후반 사지는 우주에서 만나자는 루이스의 약속과 격려 덕분에 그 후에도 성실히 면학에 힘써 결국 우주에서 일을 하게 된다...로 마무리 된다. 세컨드 시즌에 세츠나에 의해 솔레스탈 비잉에 합류하고 여러 사건을 겪게되지만, 내가 바라는 사지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더블오 퍼스트 시즌과 세컨드 시즌에 나온 사지의 모습을 보면 스로네 사건 이후로 몸도, 정신도 완전히 붕괴된 루이스에게 힘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누나마저 살해당한 와중에서도 정신을 가다듬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세컨드 시즌에서 어로우즈의 실상과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의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어로우즈에 가담한 루이스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인물...이었지만 난 사지라는 캐릭터에게 조금 더 많은 것을 바랐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사지를 엔지니어로 남겨놓은 것은 제작진의 역량 부족... 이었다고 본다.
세컨드 시즌에서 사지는 키누에의 뒤를 이어 언론인이 됐어야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설정상 키누에와 사지의 아버지는 언론인이었고, 키누에는 아버지를 동경해 JNN의 기자가 됐다는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그녀의 동생인 사지 역시 언론인이 될 자질은 충분했으리라고 본다.

우주에서 보자는 루이스의 편지 따위보다는 누나의 죽음과 루이스의 불행을 가져온 솔레스탈 비잉의 뒤를 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의 기자가 됐으면 오히려 사지의 운신폭이 기존 세컨드 시즌의 엔지니어 사지보단 훨씬 넓었을 것이다.

퍼스트 시즌에서 엔지니어 사지가 우주 정거장에서 세라비의 GN 드라이브 빛을 보는 건, 기자가 된 사지가 누나의 죽음, 루이스의 불행을 가져온 솔레스탈 비잉을 쫓기 위한 취재원을 만나는 장면으로 충분히 대처가 가능했을 것이고, 카탈론이라는 저항군 역시 사지가 기자라면 훨씬 접촉하기 용이했을 것이다.
원래 기자라는 인간들은 정보통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보를 모으는 것이 목숨을 걸기 때문에 기자가 된 사지가 열심히 모아온 정보는 퍼스트 시즌 이후로 지원을 받기 어려워진 솔레스탈 비잉에겐 귀중한 정보원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엔지니어 사지가 없으면 오라이저는 누가 조종해서 세츠나에게 가지고 가느냐는 의문이 있겠지만, 그건 아까 퍼스트 시즌 마지막 장면을 기자 사지로 대체하는 방식대로 어떻게든 설정을 맞추면 그만이다.
오히려 세컨드 시즌의 사지를 보면 뭔가 어색한 장면이 많은데... 루이스만 줄창 찾아대는 모습에서 “네 뒷바라지 하던 누나는 그새 잊은 거냐, 이 색히야!”라는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거기다가 사지 놈은 누나의 죽음에 솔레스탈 비잉이 연관돼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톨레미에서 나름 정보를 제공해주려고 빨간 하로를 줬을 때 루이스 관련 정보만 검색했다...

누나의 뒤를 이어 기자가 됐다면 사지는 누나를 잊고 여친만 줄창 찾아대는 엔지니어 사지보단 훨씬 입체적인 캐릭터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건 모두 기동전사 건담 OO가 가진 태생적인 한계였다. 퍼스트 시즌, 세컨드 시즌 합쳐서 총 50화로 끝낼 분량이 아닌 이야기를 억지로 끼워넣다 보니 매력적인 배경을 가진 캐릭터들이 말 그대로 증발했다.
군상극의 느낌이 강했던 퍼스트 시즌과 달리 세컨드 시즌은 순수종 이노베이터인 세츠나와 이노베이드인 리본즈의 대립에 스토리가 집중돼 있어 퍼스트 시즌에서 거론된 인물들의 인간관계가 갑작스레 끝나거나 떡밥회수를 한 시점에서 종료되는 형태로 진행된다.

그나마 주인공 세츠나는 어느 정도 개연성을 찾았지만, 세츠나에게 모든 서사가 집중되는 바람에 록온과 티에리아는 간신히 존재감을 챙겼고, 알렐루야는 비중이 공기-톨레미 배터리-가 됐으며, 제작진이 공언한 여주인공 마리나도 비중이 극히 적어지지 않았는가?

조금 더 부연설명해주면, 퍼스트 시즌 중반부터 떡밥을 투척했던 알렐루야와 소마의 시나리오는 세컨드 시즌 초반부에 갑작스럽게 끝나버렸고, 2대 록온 스트라토스가 되는 라일의 에피소드는 고작 어뉴와의 연애 플래그와 알리와의 대립 구도 정도가 전부였다.

이중, 최고의 개그는 세츠나의 라이벌 기믹으로 등장한 그라함은 갑자기 괴상한 사무라이가 되어 나타났다는 거겠지.

전장 속에서만 살아야한 세츠나와 대비되는 민간인이었지만 결국 전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사지의 서사를 풀어내기엔 제작진의 역량이 부족했다.
고작 50화 분량의, 그것도 에피소드 1편당 분량이 고작 30분 내외라는 약점을 가진 일본 애니메이션 특성상 건담이란 타이틀이 가진 무게감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마도 미국 드라마 방식처럼 제작됐다면 중간에 개연성을 날려먹거나 캐릭터 간 스토리 비중에 실패하거나, 떡밥을 맥거핀으로 남겨버리는 짓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 드라마야 보통 4시즌은 넘게 방영되는 데다가 각 시즌간의 공백도 적기 때문에 스토리를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다. 거기다가 미드는 보통 일반적인 방영시간이 1시간 정도는 웃도는 경우가 많다. 이를 일본 애니메이션에 적용하려고 했으니 더블오에 개연성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 화수도 적은데다 한 화당 방영시간도 적었다. 다시 말해 25화 내에 완결된 스토리를 짜야 했다는 소리인데, 이거 쉬운 일 아니다.
더블오 방영이 끝났을 때 떡밥 미회수-대부분 떡밥은 단편 만화, 외전 소설 등 관련 미디어 믹스로 해결했다-, 개연성 부족 등으로 욕을 대차게 먹었는데, 더블오 이후에 방영된 AGE나 철혈의 오펀스가 더블오 보다 못한 완성도로 욕을 더 먹어서 더블오의 재평가가 이뤄졌다... 진짜 인생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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