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engers - Legacy of Legend 제7부 Defenders: Dark Resurrection 제4편 희생 (3) 팬픽, FAN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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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ngers - Legacy of Legend











제7부 Defenders: Dark Resurrection  


제4편 희생 (3)


“무슨 장난질인 건지? 수십 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너희 놈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아가씨였지. 그런데 지금 왜 네 놈들이 여기에 있는 거냔 말이다!”

훈이 일륜도를 겨누며 노호성을 터뜨리자, 아가씨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지? 같은 혈귀니까 이해할 줄 알았는데…….”

“같은 혈귀라고 하지 마. 그리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만들지도 말고. 아가씨를 어떻게 한 거지?”

그러자 아까까지 훈과 치열하게 싸웠던 쿄스케가 나섰다. 그는 아가씨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훈을 향해 조롱하듯 말했다.

“너도 머리가 있으니 대충 알 거 아니냐? 왜 이 여자가 여기에 있는지를. 귀살대와의 싸움에서 몰살당한 줄 알았지만 살아남은 혈귀가 있었고,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거지.”

훈은 자신의 일륜도를 들어 어깨 위로 올려 두고는 상체를 숙여 자세를 갖췄다.

“아가씨는 혈귀가 될 바엔 자결을 하실 분이다. 그러니 지금 네 놈들은 아가씨를 이용해 장난질을 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군. 아가씨의 이름을 더럽히는 네 놈들은 내가 목을 치겠다.”

서준은 지금 이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훈이 맹렬한 분노를 토해내고, 훈의 분노는 쿄스케라고 불린 남자와 아가씨라는 여자를 향해 있었다. 
2대 1로 싸우고 있는 훈이 걱정돼 끼어들긴 했지만 지금 이들의 관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름 눈치가 있는 터라 서준이 파악한 것은 쿄스케라는 남자는 아까 홍룡문에서 어떤 여자를 납치해간 남자였고, 훈은 그와 맞서고 있었으며, 새로 나타난 아가씨라는 사람은 훈이 알고 있는 사람 같았는데,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해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훈이 검을 쥐고 진심을 다해 덤벼들 기세를 보이자, 쿄스케는 흥이 깨졌다는 듯, 옆에 있는 아가씨에게 말했다.

“시노부, 네가 한 말이랑 다르잖아? 저 녀석, 널 보면 우리 편이 될 거라며?”

“그럴 줄 알았는데…… 계산 착오인 듯 하네요. 이 정도로 혈귀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포기할 건가?”

“그럴 리가요. 카오루는 제 꺼인 걸요. 시간이 필요할 거 같네요.”

어떻게든 훈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시노부의 자신감에 쿄스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어둠 속으로 휙하니 사라졌다. 훈이 추격하려고 했지만 그의 앞을 아가씨가 막아섰다.

“카오루, 선택받은 자들만 혈귀가 될 자격이 있다는 걸 기억해.”

“외모는 닮았지만 넌 아가씨가 아니다. 아가씨와 넌 가치 기준이 달라.”

“글세, 내가 쿄쵸우 시노부인데. 그걸 부정할 셈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아가씨는 혈귀가 될 바엔 스스로 목숨을 끓을 분이다. 너 따위가 아가씨의 이름을 함부로 쓰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훈이 엄청난 스피드로 달려 나갔다. 훈의 입에선 ‘시이이……’하는 호흡이 흘러나왔고, 그의 어깨에 걸쳐진 검이 어느 순간 납도 돼 있었다. 납도된 훈의 일륜도는 아가씨에데 달려가면서 번개같이 뽑아 베어내는 발도술을 선보였다.

[전집중 호흡 무의 호흡 제1형 벽력일섬]

번개 같은 발도술이 아가씨의 목을 노렸고, 아가씨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훈의 날카로운 일격을 간신히 막아냈다. 목이 날아가는 건 간신히 가드해냈지만 훈의 일격이 어지간히 강했는지 아가씨는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난 뒤에야 간신히 설 수 있었다.
놀란 기색을 얼굴 가득 담은 채 아가씨는 훈에게 말했다.

“내 목을 베겠다는 거…… 진심인가 보네?”

“아가씨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걸 두고볼 수 없으니까.”

“이래서 내가 카오루를 좋아했지. 약재상을 했을 때도 그랬으니까,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아가씨도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중에 또 오겠다라는 말을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가씨를 본 훈은 슬픈 회색 빛으로 물든 일륜도를 검집에 넣었다. 싸움이 일단락되자 서준은 훈에게 다가왔다.

“저 사람이 그 몰살됐다던 혈귀인가요?”

“그런 셈이지. 동생들은?”

“형이 도와준 덕분에 무사해요.”

훈은 서준의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아까 아가씨의 검을 맨손으로 받아넘긴 탓인 듯 했다. 혀를 끌끌 차면서 훈은 자신의 차로 가서 응급상자에서 붕대를 찾았다. 검술에 매우 뛰어났지만, 디폴트 직업이 의사인 덕분에 훈은 서준의 상처를 적절히 소독해줬고, 붕대를 감아줬다.

“네 무슬의 방어 초식은 훌륭했지만 아직 미숙한 단계구나.”

“그런데 아까 저 혈귀가 한 말이 뭐였어요? 형도 혈귀인 건가요?”

“그래.”

붕대를 감아주면서 훈이 ‘난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을 너무도 태연하게 하자, 오히려 질문을 한 서준이 더 놀랬다. 

“뭐라구요?”

“난 100년 정도 전의 시대에 살던 인간이다.”

훈은 서준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줬다. 100년 정도 전, 자신은 시바 카오루라는 이름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 부모님에게서 약재에 대한 지식을 익히고 약재상을 물려받았는데 약재상엔 늘 찾아오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다는 것, 그 아가씨에 대해 연모의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혈귀의 왕에게 습격을 당해 혈귀가 됐다는 것, 아가씨로부터 혈귀를 억제할 수 있는 법을 배운 것에 대해 말해줬다.

‘선택은 당신이 해요. 이대로 죽을 건지, 아니면 치료를 받아볼 건지.’

자신의 약방에서 스스로 온 몸을 쇠사슬로 결박하고 사람들을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한 훈에게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가씨는 과거로부터 혈귀와 싸워온 검사, 귀살대의 일원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약재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서 그 지식을 이용해 혈귀들을 퇴치했었지. 아가씨는 날 죽여야했지만 죽이지 않고, 날 연구해 혈귀를 다시 인간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지.”

뒷좌석에 잠이 든 서준의 두 동생을 태우고 훈은 자신의 집을 향해 운전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서준이 물어본 자신의 과거에 대해 나머지 설명을 마무리했다.

“아가씨 덕분에 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았지만, 인간이 되는 걸 포기했다. 아가씨가 혈귀의 왕과의 최종결전에서 전사했거든. 난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 인간이 되지 않기로 했지.”

“그런 거예요?”

“아가씨 덕분에 살긴 했지만, 인간이 아닌 몸으로 계속 살아가야한다는 불편함 정도는 있지. 그래서 일본에서 더 못 살고 한국으로 온 거지만.”

잠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 후에 서준은 다시 훈에게 물었다.

“100년 넘게 살면 어떤 느낌이에요?”

“같이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 먼저 늙어가는 게 싫은 느낌?”

“결국 형만 홀로 남게 되는 거네요.”

“뭐, 그런 셈이지. 감상적이 되는 건 여기까지 하자. 동생들을 어디 숨길만한 곳이 있니?”

“수정 아줌마네로 데리고 가면 돼요.”

“길 안내 좀 부탁하마.”

훈이 눈으로 네비게이션을 가리키자 서준은 주소 입력창을 띄우곤 수정 아줌마의 집 주소를 입력했다. 주소 입력이 마무리되자 네비게이션은 최적의 루트를 산정해냈고, 훈은 그 루트대로 운전했다.
수정 아줌마의 집 주소를 입력한 서준은 갑자기 선영이 생각이 났다. 자신의 집에 사람을 보낼 정도라면 맨 처음 타겟이 된 선영이도 분명 변을 당했을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제의 추종자들이 아빠를 노렸다면, 선영이도 위험할텐데…….”

“선영? 선영이가 누구니?”

“아까 지원이 누나가 찾아왔었어요. 아까 광선검을 쓰던 그 여자가 선영이 아빠를 납치했다고요.”

선영의 아빠를 아까 얀이라는 사람이 납치했다면 서준이 말한대로 선영은 지금 위급한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훈은 차 속도를 높이면서 서준에게 말했다.

“일단 네 동생들부터 숨기고, 선영이란 친구를 찾아가자.”

“예.”

훈과 서준을 태운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밤거리를 달려나갔다.


전 세계급 규모로 움직이는 만큼, 요원들의 활동을 위한 쉴드의 백업은 상상 이상이었다. 쉴드의 본부가 있는 미국은 그렇다쳐도 우방국이긴 해도 엄연히 타국인 한국에도 쉴드의 안전가옥이 존재할 거라곤 상상할 수 없었던 클로드였다.
슈릭터의 호의로 겨우 빠져나온 클로드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겨우 휴대폰을 빌려 콜슨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가 알려준 주소에 있는 안전가옥에 들어올 수 있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안전가옥에 들어왔을 때 클로드를 반긴 건 클린트가 겨눈 총구였고, 카케루가 내민 오메가 크리스탈이었다. 오메가 크리스탈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또 이거냐라고 생각하면서 클로드는 자리에 쓰러졌고, 쓰러진 그에 대해 쉴드 616팀 멤버들은 철저한 수색을 진행했다.
클로드에게 딱히 위험한 물건들, 그러니까 위치추적기나 도청장치가 없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쉴드 멤버들은 클로드에게 음식과 물을 주며 쉴 수 있게 해줬다.

소파에 앉아 햄버거를 우적우적 먹고 있는 클로드의 맞은편에는 노트북을 켜놓고 쉴드의 국장 닉 퓨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콜슨이 있었다. 콜슨은 지금까지 자신과 클린트, 카케루, 그리고 클로드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퓨리에게 보고했는데, 퓨리는 카케루가 얻은 가면라이더라는 강화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표정이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클로드가 슈릭터를 만나 팬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에 더해, 콜슨이 말한 오제의 추종자 이야기를 들으니 표정이 거의 썩어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됐습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서울 지하에 오제라는 괴물이 있고, 그 괴물의 봉인을 풀려고 손에서 불을 내뿜는 능력자를 납치해?]

“그보다 더 해괴한 일도 겪었잖습니까?”

[뭐, 믿는다고 치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콜슨?]

“제 팀과 클린트 바튼, 클로드 카르엘 요원에게 암흑 에너지 연구소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 잠시만 유예해주십시오.”

콜슨의 요구사항을 들은 퓨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그의 눈이 매섭게 빛을 발했다.

[이 일에 끼어 들 참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제게 어벤져스 예비 멤버들을 선별한 권한을 주신 거 기억하십니까?”

[자네와 나, 캡틴에게 선별할 권한을 줬지.]

햄버거를 한 입 더 먹으며 클로드는 콜슨이 새삼 대단한 위치에 있는 요원이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어벤져스는 쉴드 내의 특별팀으로 과거 하워드 스타크가 스티브 로저스를 중심으로 만든 슈퍼 히어로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그런 팀은 최근 다시 부활시키려고 하는 건데, 어벤져스 멤버 선발 권한이 콜슨에게 있었다니……. 그냥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로 보일 뿐인데, 대단한 인물이었다.
콜슨은 노트북을 조작하더니 퓨리에게 몇 장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퓨리가 확인해보니 콜슨이 보낸 사진은 살라딘, 이훈, 현지원, 쿠사나기 스미레, 박서준, 크리스티앙 데 메디치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중식당에서의 전투를 봤는데, 그곳에 있던 사람의 대부분이 능력자였습니다. 어벤져스의 예비 멤버로 선별할 자격은 충분히 갖췄다고 판단됩니다.”

[계속 남아서 이들을 더 관찰하겠다는 건가?]

“인류가 감당하지 못할 위협에 직면했을 때, 그 위협과 인류 사이에 서는 방패가 필요합니다.”

[그게 쉴드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한국에 발생한 귀찮은 일을 해결해주면 한국 정부에 대해 쉴드는 빚을 지워준 셈이 된다. 거기에 덤으로 어벤져스 예비 멤버에 대한 정보라니…… 퓨리에게 있어 콜슨의 제안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퓨리의 승낙이 떨어지자 콜슨은 짧게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덮었다. 그쯤 햄버거를 다 먹은 클로드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에게 물었다.

“이젠 어디로 갈 겁니까?”

“박현규 팀장에게 연락을 해봐야겠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살라딘이란 사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콜슨은 휴대폰을 꺼내 박현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공을 가르며 천천히 날아가고 있는 커다란 비공정.
이 비공정의 이름이 ‘라이트 블링거’이지만, 한 나라가 가진 모든 과학기술의 정수를 쏟아부워 만든 ‘돈지랄’의 끝판왕이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라이트 블링거를 만든 사람과, 만들도록 지시한 사람, 그리고 이 비공정에 타고 있는 승무원들만이 라이트 블링거가 비공정의 수준을 넘은 시공간 도약 우주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투르 굴지의 군벌로 성장했다가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전설의 용병대 시반 슈미터의 대장인 살라딘은 라이트 블링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승무원 중 하나였다.
믿었던 동료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동생과 칼을 맞대야했던 끔찍했던 기억에서 겨우 벗어나기가 무섭게 그는 철가면이라는 수수께끼의 남자에게 스카우트돼 라이트 블링거의 승무원이 됐다. 세상을 구해야한다는 철가면의 뚱딴지 같은 말에 이끌려 라이트 블링거에 탄 이유는 간단했다. 
죽어간 그의 연인, 세라자드가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모든 사람들의 빛이 되어주실 거죠?”

투르를 증오했던 어린 필립은 사라졌고, 투르를 사랑했던 용병대장 살라딘만이 남아있는 살라딘에게, 세라자드의 마지막 말은 그의 남은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말이 됐다. 
모든 사람의 빛이 되어주는 일. 그러기 위해선 철가면이 말한 세상을 구하는 일에 동참해야했다. 사실 철가면의 말을 반신반의했지만 그가 건네준 창세전쟁의 비록이라는 책과 거대한 비공정 라이트 블링거를 보는 순간, 일단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라이트 블링거는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승무원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로 가득한 곳이었다. 살라딘이 성장한 투르나, 어렸을 때 기억 속에 있던 팬드래건 왕국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설들이 가득했는데, 이중 살라딘의 마음에 든 곳은 각종 서적들을 모아 놓은 책들과 수련을 할 수 있는 모의 훈련장이었다. 전자는 철가면의 취향대로 꾸며놓은 거라 살라딘 취향에 맞지 않는 책들이 좀 있다는 게 함정이었고, 후자는 살라딘에게 호승심을 느끼고 있는 두 남녀가 있었기 때문에 가기 껄끄러운 장소였다.
모의 훈련장에는 게이시르 제국 황제 직속의 황제 직속의 비밀경찰기구, 제국비밀경찰(Imperial Secret Service)의 두 요원이 거의 매일 있었다. 쌍권총을 쓰며 매우 빠른 몸놀림에 검술도 어느 정도 해내는 크리스티앙 데 메디치와 제국 발키리 출신의 죠안 카트라이트가 바로 그들이었는데, 그들은 살라딘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그에게 강한 호승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요새 모의 훈련장에 가는 횟수보단 철가면의 취향대로 꾸민 도서관에 가는 횟수가 더 많아졌고, 그 날도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빌려 배정된 방에서 실컷 읽고 있는 중이었다.

“혼자서 무슨 청승이야?”

책을 읽던 살라딘이 보니, 그의 방 입구에는 크리스티앙이 서 있었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하얀 코트는 어디에 던져놨는지, 붉은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그는 한 손엔 술병을 들고 있었다. 

“바쁘지 않으면 어울려주지 않겠어? 죠안이랑 시리우스는 영 술을 못해서 말이지.”

살라딘은 말없이 책을 덮고 크리스티앙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크리스티앙이 침대 옆 테이블에 술병을 내려놓으며 앉자 살라딘은 잔을 가지고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크리스티앙은 술병을 따더니 술잔에 술을 가득 담았다.

“철가면의 이 괴상한 비공정에는 없는 게 없단 말이지. 그 중에 가장 좋은 건 이렇게 멋진 술을 잔뜩 마셔도 괜찮을 정도로 좋은 술들이 많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크리스티앙은 살라딘에게 술잔을 건네주었다. 술잔을 받아드니, 그 안에는 붉은 빛깔이 도는 향기로운 술이 담겨 있었다.

“크리……스티앙이라고 했나?”

“크리스티앙 데 메디치. 게이시르 제국의 명문가 출신이자 황제 직속 ISS의 베테랑 요원이지. 그리고 당신에게 빚도 있는 사람이고.”

자마후자리에서의 일을 말하는 건가? 살라딘은 피식 웃었다. 
크리스티앙 일행은 과거 투르의 성지라고 불린 자마후자리 신전을 무단으로 침입한 적이 있었다. 종교와 정치가 엄격히 분리돼 있고, 종교의 지도자 칼리프는 정치적 지도자 술탄 다음가는 지위를 보장받는 투르에서 성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투르 백성이라도 허가 없이 성지에 들어가면 불경죄로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하물며 이방인이라 다를까? 모른다는 건 배워야하는 문제지, 모른다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크리스티앙 일행이 성지에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사실에 살라딘과 시반 슈미터에게 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살라딘은 그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그때 크리스티앙은 총잡이 치고 굉장히 좋은 몸놀림을 가지고 있었지만 릴렌트러스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고, 죠안은 매우 빠른 속검으로 살라딘을 공격했지만 그보다 더한 얀 지슈카의 속검에 미치지 못했다. 크리스티앙은 뒷덜미를 맞아 기절하게 됐고, 죠안은 검이 부러지자 항복을 선언했었다. 심넬 램버트라는 남자가 시간을 끄는 바람에, 그들 모두 체포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한 나라의 성지를 흙 묻은 발로 들어갔으면 대가를 치워야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하는 살라딘에게 크리스티앙은 불멘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대가라면 저기 괴상한 가면을 쓰고 있는 아저씨한테나 말하지. 난 저 아저씨 부탁으로 들어간 죄밖에 없다고.”

“사실, 당신과 파트너를 상대할 때 기묘하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 맞아서 보통 내기들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거든.”

“죠안과는 사선을 여러 번 넘나든 사이니까.”

크리스티앙과 죠안의 콤비네이션은 살라딘도 감탄할 정도로 대단했다. 죠안은 개인 능력으론 얀에게 떨어졌고, 크리스티앙은 총잡이였기에 근접전에 불리했다. 하지만 서로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그들의 콤비네이션에 살라딘은 릴렌트러스 2배속을 써가며 겨우 제압해야만 했다.
두 사람 모두 한 모금의 술을 입에 담았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이어졌고 크리스티앙은 다시 술을 따르녕서 살라딘에게 말했다.

“당신한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선 들었어.”

“…….”

“믿었던 주군이자 친구는 저 멍청한 가면남한테 죽고,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부하들은 매국노한테 다 잃고,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그토록 찾아 헤맸던 동생과는 칼을 맞대고.”

그동안 있었던 일은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불행이 동시에 찾아온 건가? 살라딘은 쓰디쓴 자조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인생에 굴곡이 많은 편이지.”

“다른 건 모르겠지만 형제간의 비극은 나도 조금 알지.”

살라딘이 물끄러미 보니 크리스티앙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난 내 형을 죽였거든.”

하지만 살라딘은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에 담긴 죄책감과 쓸쓸함을…….

“……사연을 물어도 되겠나?”

“거창한 건 없어. 형이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고, 난 그걸 막아야 했고. 그래서 탕. 뭐, 그런 거지.”

“자네도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했군.”

“지금도 생각하는 건 하나야. 왜 형이 반역을 한 걸까? 난 꼭 형을 죽일 수밖에 없었나?”

살라딘의 냉철한 이성은 그 당시 크리스티앙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찾아주었다. 물론 그의 감정은 크리스티앙의 아픈 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아픈 감정을 잊게 해주는 건 냉철한 이성 밖에 없었다.

“자네의 가문을 생각하면 자네 손으로 형을 죽이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이겠지. 국가 원수에 대한 반역은 가문 전체의 멸족을 가져온다. 가문의 멸족을 막으려면 반역자를 가문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게 가장 나은 방법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뒷맛이 정말 더럽더라고.”

크리스티앙이 술잔을 내밀자 살라딘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당신 동생,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동생이 언급되자 살라딘은 흠칫 놀랐다. 살라딘의 반응을 크리스티앙은 말없이 지켜봤고, 잠시 생각하던 살라딘은 입을 열었다.

“적당히는 들었다. 팬드패건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

“점령한 투르의 영토는 모두 포기한 채 팬드래건으로 퇴각했다고 하네. 괴상한 가면 아저씨가 몰래 명령을 내린 모양이야.”

“그렇겠지.”

그렇겠지, 철가면은 팬드래건 왕국의 국왕 클라우제비츠 팬드래건이니까. 아마 제정신이 아닌 버몬트 대공을 대신해서 팬드래건 군의 퇴각을 지시했을 것이다. 살라딘은 뜻 모를 미소를 짓고는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철가면의 일이 마무리되면 당신은 팬드래건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 투르로 갈 생각이다.”

“투르? 거기서 뭘 어떻게 하려고?”

“재건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살라딘의 모습이 크리스티앙에겐 너무 쓸쓸해 보였다. 모든 걸 잃은 살라딘이 과연 투르로 돌아가 어떻게 재건하려는 걸까? 그런 생각에 잠겨들다가 곧 크리스티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쉽지 않은 일 일텐데?”

“알고 있다. 그래도 해야만 해.”

살라딘의 단호한 결심을 들은 크리스티앙은 술잔에 든 술을 홀짝거리며 마셨다. 취기가 적당히 올라왔기 때문일까? 형제와 가슴 아픈 비극을 겪은 사이여서 그럴까? 크리스티앙은 술잔에 있는 내용물을 전부 그의 체내에 털어놓고 무겁기만한 입을 떼었다.

“그럼 내가 네 일을 도와주지.”

“……무슨 소리냐?”

“괴상한 가면남 때문에 엉망이 됐지만, 그를 도와서 투르를 엉망으로 만든 책임은 내게도 있으니까. 네가 투르로 돌아가 재건을 한다면 널 도와주겠다는 거야.”

“자넨 게이시르 제국의 ISS가 아닌가? 왜 타국의 일을…….”

“어차피 철가면의 일을 끝나면 장기 휴가를 가려고 했거든. 거기다 게이시르 제국이나 내 가문이나 나한텐 잊고 싶은 일들이 참 많은 곳이고. 당분간 떠나있고 싶었는데, 딱 좋지 뭐. 네 투르 재건기에 내 이름도 함께 남으면 좋다는 생각도 들었고.”

투르 재건기라는 말에 살라딘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투르에 봉사를 하려는 거지, 재건이라는 명목으로 나라를 건국하겠다는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나라를 세울 생각은 없다. 투르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뿐이지.”

“그게 지도자로서 첫 걸음이라는 거야, 살라딘 씨. 그리고 투르에는 아직 네 정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아직도 전설의 용병대 시반 슈미터의 대장 살라딘이 언제 돌아오냐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투르의 왕족은 저번 왕자의 난 때 죄다 죽어나가고, 이젠 새 왕조가 문을 열 차례겠지.”

“하지만…….”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순 없잖아.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사람들끼리 저 전란의 국가를 어떻게든 수습해보자고. 어라? 술이 다 떨어졌네. 기다려봐, 한 병 더 가져올테니.”

크리스티앙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 곳을 떠났고 살라딘은 크리스티앙이 말한 그 내용을 곰곰이 되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적으로 보면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투르에는 왕족이 남아있지 않았고, 종교적 지도자인 칼리프 역시 사피 알 딘과 세라자드를 끝으로 더 배출되지 않고 있었다. 구심점을 잃은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있었고, 그로 인해 도탄에 빠진 건 백성들이었다.
투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그들을 돕는 일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나라를 재건해야한다니……. 이것이 세라자드가 말한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길인가? 살라딘은 곰곰이 생각하며 술을 들이켰다. 



투 비 컨티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