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GA Universe
Avengers - Legacy of Legend

제7부 Defenders: Dark Resurrection
제4편 희생 (1)
헝크러진 머리카락과 커다란 덩치, 그리고 평범해보이는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그의 목에는 허름한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가 걸려있었는데, 허름한 천 사이로 녹색의 빛이 언뜻 보였다.
지하실로 끌려온 남자는 한쪽 벽에 결박당했다. 벽에 매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의 눈에 의식이 돌아온 건, 벽에 묶인 지 1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으……. 빌어먹을…….”
의식이 돌아온 클로드는 신음성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가 평소 낼 수 있는 힘을 생각하면 이따위 쇠사슬 같은 건 금세 풀어낼 수 있지만, 지금 클로드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건 그의 목에 걸려있는 녹색 빛이 군데군데 흘러나오는 낡은 주머니 때문이었다. 주머니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녹색 빛의 보석, 오메가 크리스탈 때문이었다.
오메가 크리스탈은 클로드에게 너의 기원을 함께 연구해보자고 했던 맥스 S. 케일 박사가 알려준 광물이었는데, 클로드의 힘을 매우 약하게 만들었다. 기원을 알 수 없어 케일 박사가 대충 붙인 ‘오메가 크리스탈’이란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었는데, 강력한 방사능을 방출하며, 클로드의 힘을 약화시키고, 케일 박사의 계산에 의하면 반나절 이상 노출시키면 클로드를 죽일 수 있는 물체였다.
다만 오메가 크리스탈의 방사능은 납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납으로 된 용기에 넣으면 안전해진다. 케일 박사에 의해 존재가 알려진 오메가 크리스탈은 지금 쉴드에 의해 열심히 수집되고 있는데, 퓨리 국장은 ‘클로드의 안전’을 위해 모아 폐기한다고 했지만, 클로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분명 클로드에 대한 대비책으로 모아놓는 거겠지.
어쨌든 허름한 주머니에 있는 오메가 크리스탈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터라, 클로드는 이걸 풀어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메가 크리스탈로 인한 고통을 거진 1시간 넘게 당하고 있으니, 자신도 참 기구한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불완전해서 이름 말고는 제대로 아는 게 없고, 엄청난 힘과 강철보다 단단한 신체를 가지고 있고,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알 수 없는 물건 때문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팬텀이라는 놈들과는 왜 적대하게 됐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수년 째 계속 싸워오고 있었다.
쉴드의 명예요원이 되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팬텀들을 금세 잡고, 엑셀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현실은 수년째 팬텀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토니 스타크, 브루스 배너, 샤론 로저스의 일에 휘말려 미국, 브라질, 한국에, 얼마 전엔 독일까지 다녀오는 등 이제는 팬텀을 쫓는 본래의 목적보단 쉴드나 어벤져스 프로젝트의 일을 더 많이 하는 느낌이었다.
쉴드의 명예요원이라고 하지만, 콜슨의 팀에 소속되어 처리한 임무의 숫자가 굉장히 많았고,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토르, 헐크에 이어 어벤져스 프로젝트에 핵심 인물로 꼽힐 정도니 이건 말 다한 셈이었다.
“하, 진짜…… 기억상실이 된 것도 3년이 넘어가는데…… 이젠 좀 진도가 있어야하는 거 아닌가?”
라고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오메가 크리스탈이 주는 고통 때문에 클로드는 제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제대로 투덜거리지도 못하는 클로드 앞에 어떤 사람이 나타난 것은 그가 정신이 든지 5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지하실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슈릭터였다.
뜬금없이 슈릭터가 나타난 것에 클로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슈릭터는 그저 말없이 클로드의 목에 걸린 주머니를 떼어다가 어떤 상자에 넣고 닫았다. 그러자 클로드는 자신의 몸에 가해졌던 오메가 크리스탈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메가 크리스탈에 노출됐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사기적인 회복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로드의 힘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만전의 상태에서 슈릭터와 싸워도 이길까 말까인데, 이 상태라면 슈릭터가 마음만 먹으면 클로드를 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남미인가? 이상한 유적에서 만난 이후로 반년만인가?”
“너…….”
“그 보석이 없어져도 네 힘이 회복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다. 네 회복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빌어먹을 보석은 특제품이니까.”
“큭…….”
“뭐, 잘 됐지. 네 녀석하고는 이렇게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
잔뜩 긴장하며 클로드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슈릭터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놓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의자였는지 먼지가 살짝 일어났고, 그 먼지는 슈릭터의 블랙 진에 살짝 묻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클로드가 묻자 슈릭터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벌써 말을 할 수 있게 됐나? 확실히 네 힘은 무섭군. 회복되는 속도를 보니 평화롭게 얘기 나눌 시간은 30분도 안 되겠군.”
잠시 손목시계를 보던 슈릭터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매우 진지한 얼굴로 클로드에게 물었다.
“네 기억의 끝은 어디까지냐?”
“그걸 왜 궁금해하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슈릭터가 도움을 준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지만 클로드 입장에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 클로드는 묶어있고, 힘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괜시리 객기 부리며 슈릭터의 비위를 거슬렸다간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살해당할 게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클로드는 파편화된 자신의 과거 중에 남아있는 기억들을 입에 담았다.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엑셀에 대한 단편의 기억, 그리고 이 세계로 오게 된 이후의 기억까지 전부 슈릭터에게 말했다.
잠자코 클로드의 이야기를 들은 슈릭터는 턱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 실망을 했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다시금 5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슈릭터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역시…… 중요한 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군.”
“뭐라고?”
“그럼 하나 묻지. 너의 기억이 돌아왔을 때, 넌 어떤 선택을 할 거냐?”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고 묻는 클로드에게, 그는 또 하나의 선문답을 던졌다.
“모든 것의 끝에서 절망을 맛본 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타락하거나, 잊어버리거나.”
“그 말 뜻은 내가 타락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잊어버리던가……. 넌 어떤 선택을 할 건지 궁금하군.”
“시끄럽고, 내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서! 방법이나 말해.”
클로드는 버럭 화를 냈다. 힘이 어느 정도 회복됐는지, 클로드의 양 팔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이 ‘이거 좀 버티기 힘들겠는데요’라고 말하듯이 끼긱거리는 신음성을 냈다. 클로드의 힘이 생각 외로 빨리 돌아오고 있다는 걸 눈치챈 슈릭터는 품에 손을 넣더니 작은 반지를 꺼냈다.
슈릭터가 꺼낸 반지는 중앙에 박혀있는 아름다운 보석 뿐만 아니라 손가락을 감싸는 부분도 아름답게 세공돼 있었다. 뛰어난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듯한 아름다운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고, 반지 중앙에는 색감이 알의 흰자를 닮아 단백석이라고도 불리는 오팔이 박혀있었다.
“이건 나를 포함한 네가 팬텀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반지다. 이 반지에 박혀있는 보석이 바로 우리의 기원이고, 우리의 모든 힘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이걸 다 모으면 네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밑져야 본 전 아닐까? 어차피 이 보석들을 전부 모으기 위해선 팬텀 모두를 찾아야하고, 그들을 죽여야지만 이걸 빼낼 수 있지. 사람들을 해치는 팬텀을 해치우는 게 바로 네 목적 아니었나?”
클로드의 의문은 당연했지만, 슈릭터의 반응 또한 당연했다. 슈릭터를 전혀 믿을 수 없는 클로드는 네 말이 사실이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슈릭터는 어차피 내 말이 거짓이라도 네 입장에서 밑져야 본전 아니냐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하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팬텀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으니까. 나처럼 먹어치우는 놈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꼭두각시로 써먹는 놈도 있으니까.”
클로드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자, 슈릭터는 반지를 다시 품 안에 넣곤 지하실 바깥으로 나가는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렸다. 지하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슈릭터는 아직 힘이 덜 회복된 클로드에게 말했다.
“아, 중요한 걸 하나 말하지 않았군. 팬텀은 나를 포함해 모두 여섯이다. 네가 우리의 정확한 숫자도 모르는 거 같아서 알려주는 거다.”
그 말을 남긴 채 슈릭터는 지하실 바깥으로 나갔다. 슈릭터가 사라지고 홀로 지하실에 남겨진 클로드는 그가 한 말을 곰곰이 다시 되짚어봤다.
슈릭터.
처음 만났을 때 최악의 인상을 남긴 자이긴 했지만, 그동안 쉴드를 따라다니며 팬텀의 음모를 막으면서 그와는 꽤 여러 번 마주쳤다. 그때마다 빡쳐서 달려든 건 클로드였고, 슈릭터는 그를 상대하면서 이상한 선문답을 여러 번 던졌는데, 그의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무언가를 알려주기 위한 힌트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오메가 크리스탈이 없어진 이상, 클로드의 힘은 서서히 돌아왔다. 어느 정도 힘이 회복된 것을 느낀 클로드는 양손에 힘을 주어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을 끊어냈다. 아직 힘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쇠사슬이나 강철로 된 문 정도는 그에게 장애물조차 되지 못했다.
클로드는 주먹을 쥐곤 강철문을 바라보았다. 슈릭터가 팬텀의 숫자를 말해줬고, 그들을 제거해야하는 목적도 알려줬다. 이제 남은 건 바깥에 나가 그들을 모조리 잡는 일이었다.
“일을 시작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는 강철문을 주먹으로 쳐서 부숴버렸다. 문과 벽을 여러개 부순 끝에 클로드는 인적이 드문 어느 농촌의 폐가에서 나올 수 있었다. 바깥으로 나온 클로드는 저 멀리 보이는 화려한 조명을 가진 도시를 보곤 그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울 내의 어느 건물.
그레이 팬텀이 은신처로 사용하는 건물 중 하나인 이곳에 살라딘에게서 겨우 도망쳐 나온 얀이 서 있었다. 살라딘에게선 얀 지슈카로, 그녀와 함께 있는 자들에겐 아퀴루핌이라는 2개의 이름을 가진 여자는 방 한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다가 번개같이 검을 뽑아들어 뒤를 겨누었다. 츄앙하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빛의 검신을 뻗어낸 그녀의 광선검은 막 방 안으로 들어온 한 남자의 얼굴 앞까지 길기 이어졌다.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는 손을 들어 검은 후드를 벗어 회색빛으로 물든 장발과 창백한 낯빛을 드러냈다. 그는 뫼비우스였다.
“수고했다. 역시 투르 최고의 예니체리 다운 실력이더구나. 다만…….”
뫼비우스가 가볍게 손을 놀리자 얀은 짧은 비명과 함께 광선검을 떨어뜨렸다. 빛의 검신을 잃은 광선감은 바닥에 떨어졌고, 얀은 하얗게 서리가 낀 손을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이런 식으로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네 전사로서의 실력에도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단다.”
“그 남자…… 누구인거죠?”
살라딘에 대해 물었지만, 뫼비우스는 아퀴루핌, 얀에게 진실을 밝힐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 이전 삶에서 내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녀가 죽는 걸 지켜봐야만 했어. 뫼비우스의 우주를 위한 일이었지.”
“…….”
“넌 네 의사와는 무관하게 죽음에서 되살아났지. 네가 혼란스러워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네 삶은 뫼비우스의 우주를 이끌 존재로서의 선택된 삶이란 걸 이해하길 바란다.”
“뫼비우스의 우주…….”자신의 이름과 같은 우주를 위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우주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뫼비우스로 지은 것일까? 뫼비우스는 얀의 손을 얼린 한기를 손에 거머쥐며 읖조렸다.
“우리의 적, 안타리아의 방랑자에게 대항할 무기로서 말이다. 만약 네가 그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넌 그레이 팬텀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거다. 물론 내게도 말이야.”
잠시 고민하던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제 역할을 수행할 겁니다.”
그때 뫼비우스의 뒤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멋진 정장을 입고 한쪽 눈에는 모노클을 꼈으며, 중절모까지 쓴 이 남자, 홍룡문에서 이세영을 위해 싸우던 하바나 요시하루였다. 요시하루는 뫼비우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저희 수장께서 도착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소.”
요시하루가 앞장서자 뫼비우스는 얀과 함께 그들의 수장, 이세영이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어두운 복도를 잠시 걷던 이들은, 곧 한 무리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에 도착했다.
회의실 안에는 이세영과 그녀를 따르는 자신이 있었고, 그들의 반대편에는 흑색의 풀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있는 레아틀론과 기다란 저격용 라이플을 든 채 귀를 후벼파고 있는 연녹색 머리의 여자, 그리고 간호사를 연상시키는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세검을 허리에 찬 여검사가 서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요시하루는 이세영 쪽으로 걸어가 그녀의 뒤, 지신의 곁에 섰고, 뫼비우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 옆에 섰다. 뫼비우스는 먼저 이세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다리게 했군. 불꽃의 전승자를 잡았다고 하던데?”
“덕분에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레이 팬텀의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건가?”
“그 전에 수십 년 전 회색의 남자에 의해 저지됐던 우리의 계획을 다시 한 번 되짚어봐야할 거 같습니다.”
이세영이 과거의 일을 언급하자 뫼비우스는 됐다는 듯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회색의 남자는 우리의 실수요. 그 점에 대해선 내 사과하지.”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죠. 중요한 것은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잘못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갑자기 회색의 남자와 관련된 일을 왜 꺼낸 걸까? 뫼비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세영을 보았다. 그녀는 분명 회색의 남자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그때도 그레이 팬텀은 우리를 도왔지요. 그래서 최고의 전력이라고 했던 회색의 남자를 내주었죠. 하지만 그는 우리뿐만 아니라 그레이 팬텀마저 배신했고, 우리 조직을 괴멸 상태까지 몰아붙였습니다. 그때 그레이 팬텀 역시 막대한 타격을 입었던 걸 기억하지요?”
“그때의 기억은 잊고 싶다만…….”
뫼비우스가 딴청을 피우자, 이세영은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전 조직 대부분과 함께 제 딸을 잃었습니다.”
상대가 강하게 나오는 상황에서 더 이상 딴청을 피우는 건 무의미했다. 뫼비우스는 섬뜩한 안광을 빛내며 이세영에게 말했다.
“누구의 상처가 더 큰지 내기하자는 건가? 아니면 네가 말하고 싶은 불안요소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저 여자!”
이세영은 아퀴루핌을 가리켰다. 분명 홍룡문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뫼비우스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안타리아의 방랑자와 저 여자가 함께 있는 걸 봤습니다.”
“뭐가 걱정이지? 안타리아의 방랑자가 실력 있는 전사인 건 맞지만 곧 제거될 거다.”
“그의 강함이 걱정되는 게 아닙니다. 그 자와 저 여자의 관계 때문에 우려하는 거죠. 지난 삶에서 저 여자는 안타리아의 방랑자를 위해 싸웠습니다. 아니, 그 이상이었죠. 사랑하는 사람 아니던가요?”
살라딘과 아퀴루핌이 만나 격돌한 것은 딱 2번이었고, 홍룡문에서 격돌했을 때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이세영이 여기까지 추론해낸 것은 나름 대단한 일이었다. 뫼비우스가 말없이 자신만 보고 있자, 이세영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고 그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불꽃의 전승자를 데려오려고 할 때 저 여자는 안타리아의 방랑자를 공격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싸움이 아니라 레아틀론으로부터 그 자를 보호하기 위한 거 아니었던가요?”
“……그게 상의하려던 건가?”
“제 생각엔 그녀는 당신이 약속한 전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세영이 아퀴루핌을 매도한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그레이 팬텀과 손을 잡은 오제의 추종자들은 그레이 팬텀이 약속한 최강의 전력 ‘회색의 남자’로 인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 이후, 다시 오제의 봉인을 풀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들의 전력은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레이 팬텀에게 과거의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전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뫼비우스가 내준 최강의 전력 아퀴루핌이 과거 회색의 남자처럼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만큼 오제의 추종자들에겐 회색의 남자는 공포의 존재였다.
“아퀴루핌이 실패한 존재라고 생각하나?”
“아뇨, 당신의 계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회색의 남자 때 큰 실패를 맛봤으면서 이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려고 하고 있죠.”
이세영의 매도가 선을 넘고 있다고 생각한 뫼비우스는 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똑같은 실수란 없다. 그리고 이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소모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상기시켜줘야겠군.”
이세영이 입을 다물자, 뫼비우스는 짧게 한숨을 쉬면서 그녀에게 약속했다.
“계약대로 돕도록 하지. 아퀴루핌만으로 불안하다고 하니, 레아틀론과 엘샤루핌을 함께 보내겠다.”
뫼비우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뒤에 얌전히 시립해 있던 검은 갑옷의 레아틀론과 간호사 복장의 엘샤루핌이 앞으로 나섰다. 불안한 아퀴루핌에 비해 뫼비우스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다른 부하들을 내주겠다는 말에 이세영은 화를 가라앉히기로 했다.
“협력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것이고 오늘 저녁, 아버지의 봉인이 풀릴 겁니다.”
뫼비우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세영은 같은 추종자인 지신과 요시하루를 데리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요시하루가 뫼비우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의 눈치를 보며 세영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제 어쩔거지?”
“그레이 팬텀 없이 계획을 짜야 할 때인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는 이세영의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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