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쫓았던 인간들의 군상극,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일상, DAILYLIFE





포스팅을 위해서...




책을 샀다.


뭐 책을 새로 산 덕분에 찬찬히 원작을 읽어볼 기회가 생겨 좋았다. 그 덕분에 드라마를 좀 더 세심한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다.






추리여왕이라고 불린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영국 BBC에서 드라마로 만든 버전이다. 수려한 영상미와 충실한 원작 고증이 마음에 드는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이 가진 기묘한 미스테리를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영상으로 옮겼기 때문에 난 아주 좋았다.

거기다 완전히 원작을 옮긴 게 아니라 원작이 가진 다른 면을 조명했기 때문에 이 부분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괜시리 명작을 망친 이상한 해석을 하지 않고, 원작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한 다른 면을 조명한 것이 매우 좋았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죄를 선고하는 장면, 그리고 모두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와중에도 혼자 죄를 인정하는 롬바드를 역겨운 인간이라고 비난하는 찌질함은 이 드라마의 백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 원작은 여길 그냥 넘어갔어. 베라가 경악한 걸로 끝나는 게 좀 심심했지.



골수 기독교도인 에밀리 브렌트는 원작에서 문제의 하녀를 내치는 데에 기독교 기질과 나이 들면서 다져진 아집이 강하게 작용한 걸로 나오지만, 드라마에선 동성애적 코드가 묻어 나온다. 뭐, 다른 거 다 필요없고 상처난 하녀의 손가락을 질펀하게 빤 거에서 모든 게 설명...




블로어의 과거도 조금 다른데, 원작에선 블로어는 제임스 란더를 강도라는 누명을 쓰게 하고 종신형을 언도받게 만든다. 강도 누명을 쓴 란더는 자살했는데, 드라마판에서는 화장실에서 은밀한 손장난을 하다가 걸렸다고 한다. 처음엔 훈방을 시켜줄 것처럼 제임스를 달래던 블로어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더니 얼굴이 함몰될 만큼 죽도록 팼다. 그리고선 남들에게는 제임스가 술 때문에 토하다가 그만 질식해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블로어가 제임스 란더를 죽도록 팬 건 정황상 게이 혐오...인 걸로 보인다.


따라해봐, 블로어 개객끼! 라고 해도, 그 시대에는 동성애는 금기시됐으니...



살해방법이 원작과 다르다. 원작이 1930년대에 쓰여졌고, 드라마가 2015년 작이니까 살해방법을 좀 더 현실적으로 각색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살해방법은 모두 원작과 같지만, 머리에 도끼를 맞아 죽은 로저스는 드라마판에선 배에 맞는 걸로 바뀌었다. 덕분에 내장이 쏟아진 끔찍한 장면을 봐야했다. 어우...

에밀리 브렌트는 청산가리가 든 주사기에 찔려 독살 당한 뒤, 벌에 쏘인 것처럼 위장됐지만 드라마판에선 평소 뜨개질 하던 바늘로 목을 찔려 죽는다. 블로어는 원작에선 2층에서 던져진 곰을 조각한 대리석 시계에 맞아 죽었지만 드라마에선 배에 칼을 맞고 북극곰 가죽 카펫에 덮이는 걸로 나온다.

후반부에 가면 베라와 롬바드는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다. 원작에서도 베라가 롬바드를 믿으면서 엮이는 장면이 많으니 이 정도는 뭐...


원작과 가장 다른 부분은 원작에선 가장 마지막에 나오던 워그레이브의 편지와 경시청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그 부분을 통해서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고,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는지가 다 나오는데, 드라마판에선 그런 거 없이 그냥 끝난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워그레이브의 편지가 없는 대신, 엔딩이 원작과 다르다. 원작에선 베라가 죄의식과 심리적 억압, 최면적인 환경에 의해 목을 매달아 자살하지만, 드라마 판은 모습을 드러낸 워그레이브를 보고 놀란 베라가 의자에서 넘어지고, 간신히 매달린 채 그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듣는 걸로 스토리가 이어진다.


이때 워그레이브 판사의 모습은 왕좌의 게임 타이윈 라니스터를 보는 거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어우, 지렸...


원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과 살아남은 등장인물들이 진상을 추리하는 스릴러와 미스테리에 집중했다면 드라마판은 원작의 또 다른 면인 등장인물들의 ‘원죄’‘가증스러움’에 초점을 맞췄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각 인물들의 죄를 선고하는 장면에서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만 하던 사람들이 마스턴과 롬바드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털어놓자 역겹다고 맹비난하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그들 또한 마스턴, 롬바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인간들이었다는 게 정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꿈이나 대화, 회상을 통해 등장인물들이 죄의식이나 이로 인한 고뇌가 조금씩 엿보였지만 드라마판은 등장인물 모두의 죄의식에 대한 묘사가 상당했다.

등장인물 하나하나 회상 장면을 넣어서 과거에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를 표현하고, 이로 인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모습들이 나온다. 물론 죄의식 자체가 없는 마스턴이나 아집과 기독교적인 기질로 괴상한 인간이 된 브렌트는 전혀 그런 게 없지만...


초반부터 수많은 회상을 통해 죄의식을 드러냈던 베라가 엔딩에서 워그레이브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이야말로 드라마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목을 매달려다가 넘어진 의자에 기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베라는 워그레이브에게 사건의 진상을 들은 뒤, 살려달라고 구걸한다. 거기다 자신과 연인 비슷한 관계였다가 자신이 총으로 쏴 죽인 롬바드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자고 비굴하게 제안하는 모습은 도대체가...


이 드라마에 나온 인간들은 하나같이 동정의 여지가 없는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인간들이었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장점은 수려한 영상미다. 원작의 고증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원작도, 이를 충실하면서도 약간의 어레인지를 가한 BBC 드라마판도 모두 좋았다. 원작은 범인이 자신의 범행 일체를 자백한 편지를 병에 넣어 바다에 던졌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드라마판은 그런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김전일도, 코난도 아닌 이상 이거 진상 밝힐 수 있을까? 원작을 읽거나 드라마를 본 사람이면 모를까,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사건 현장에 간 수사관들은... 어우...

이거 미제사건이 될 가능성이 100%다. 범행을 자백한 편지라도 있는 원작이 아니라 그것조차 없는 드라마판이라면 말이지.

드라마 마지막에 워그레이브가 베라에게 바깥사람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알 방법이 없다면서 아마 몇 년은 골치 아파할 거라고 비웃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네...

원작에서도 워그레이브는 이 사건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거라고 자신하면서도 사건을 해결할 3가지 단서가 있다고 언급한다. 근데 그거 가지고 사건을 해결하면... 그 사람은 셜록이나 김전일, 코난이다.


그러니 어서와서 풀어라. 수수께끼가 여기에 있으니까!